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의 전쟁범죄 (문단 편집) == [[학살]]과 [[강간]] == >[[여자]]들이 가장 고통을 받았다. '''나이에 관계없이 그녀들은 모두 [[강간]]당할 운명을 피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더 많은 [[여자]]들을 붙잡기 위해 (중략) 석탄 트럭들을 도시 중심가와 마을로 보냈다. 그리고 트럭마다 [[강간]]을 하기 위해 15명에서 20명씩 [[군인]]들을 배분했다. > >우리가 그녀들을 [[강간]]하기만 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행이라는 소리는 못하겠다. '''우리는 항상 그녀들을 칼로 찔러 죽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 >― '''[[난징 대학살]]에 가담했던 일본군 114사단 퇴역병 아즈마 시로 등의 증언 中''' >전투를 할 때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약탈인데, 상관도 제 일선에서는 보고도 못 본 척하니 마음 내키는 대로 약탈을 하는 자도 있었다. 어느 중대장은 "볼 일이 다 끝났으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돈을 쥐어 주든지, 아니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그냥 죽이도록 해라."며 몰래 강간을 한 뒤의 처리방식까지 가르쳐주었다. 전쟁에 참가한 군인을 하나하나 조사했더니 모두 강도살인, 강도강간의 범죄자들뿐이다. >----- >― 1939년 2월 육군성 비밀문서 제 404호, '사변지에서 귀환한 군대와 군인의 상황' 中 이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 그 유명한 [[일본군 위안부]]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 이후에도 [[양민학살]]과 [[강간]]을 일삼았으며[* 원래 전쟁에서의 강간은 성욕의 문제가 아닌 생존본능의 문제이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아군이나 적군을 직접 보면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 라는 공포에 매일매일 시달리는 것에 대한 방어기제로서 성관계를 찾은 것이다. 그래서 보통은 병사들의 공포감을 해소하면서, 전쟁범죄라는 문제도 막기 위해서 병사들을 나누어서 배치를 주기적으로 바꾸거나, 충분히 휴식할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군대 내부에서 구타나 가혹행위가 만연할 정도로 막장이었고, 이런 과정에서 쌓인 병사들의 불만과 공포감을 해소하기 위한 휴식의 개념도 없었기 때문에 유독 강간과 학살이 자주 일어났다. 즉, 군대 내부의 근본적인 부조리와 시스템이 해결되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위안부를 징집해도 학살과 강간 사건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막장 전설은 "시베리아 출병" 이후로도 지속되어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까지 지속된다. 특히 [[난징 대학살]] 당시에는 미쳐 날뛰는 일본군들이 무려 8만 명에 달하는 [[중국]] [[여성]]들을 강간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영어]]로 [[난징 대학살]]을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이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jing)이다.[* 이는 [[중국계 미국인]] [[아이리스 장]](1968-2004)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녀의 부모는 [[난징 대학살]]을 피해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난징의 강간>은 [[베스트 셀러]]가 될 정도로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나, 아이리스 장은 [[일본]] [[극우]]들의 끊임없는 협박을 받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만주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은 점령지 어디에서나 초지일관하게 대량 학살과 강간을 자행했다. 특히 중국전선에서는 중국인들은 미개한 인종이라고 선전 세뇌하던 일본 군부의 세뇌 교육 탓에 많은 일본군 병사들이 중국인들을 같은 사람이 아닌 돼지와 같은 짐승으로 여겼다. >우린 달아나는 여자들을 바로 죽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달아나면 그제야 등에 총을 쐈다. '''강간할 때는 여자로 보였고 죽일 때는 돼지로 보였다.''' >----- >― 다코코로 코조 114 사단 병사 2차 대전 당시 드러난 일본군의 인명 경시는 군부독재 이전 제국주의 시절에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일례로 3.1 운동 중에는 그 당시 현장을 목격한 서양인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이 오른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을 외치던 한국인 초등학생 소년의 오른손을 총검으로 베어버리자 그 아이는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번엔 다른 일본군이 왼손을 잘라버리자, 그 아이는 목청껏 독립 만세를 외쳤고 세 번째 일본군이 가슴을 총검으로 찔러 잔인하게 살해했다. 기자는 아이가 죽은 이후에도 일본군이 계속 총검으로 시체를 유린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일본군은 이 서양인 기자에게도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사진기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키 다나카가 저술한 일본군의 범죄 행위를 고발한 책인 '히든호러'에는 당시 일본군의 동맹국 국민들에 대한 학살 행위가 자세히 묘사된다. 1943년에 [[파푸아뉴기니]]의 Kavieng에선 동맹국 국적인 [[독일인]] [[목사]] 약 10여 명과 [[독일인]] [[수녀]]들을 매달아 놓고 [[기관총]]으로 쏴 잔인하게 학살했다. 연합군이 상륙하면 같은 [[백인]]이니 협력자가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 내에서는 동맹국인 독일의 음악조차 금지했다.][[http://yangsp3.egloos.com/5804348|#]] 게다가 당시 현지에 민간인들이 몇 명 정도 있었는지 대충 파악하고 있던 [[호주군]]이 전후 민간인들이 어디로 갔는지 샅샅이 조사하다가 2년만에 학살을 밝혀냈고, 이때 체포된 일본군 장교들은 전부 다 책임회피하고 서로 떠넘기기에 급급했다.[[http://yangsp3.egloos.com/5804567|#]] 또한 1945년 필리핀 전투 당시 격전지 중 하나였던 [[마닐라]]에서도 친추축국인 [[프랑코 정권|스페인]]의 영사관에서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이를 [[미군]]의 무차별 학살이라는 거짓말을 하며 해명했지만, 당연히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격노했고 스페인은 즉시 일본과의 국교를 단절했다.[[http://cal50.egloos.com/3079342|#]] 당시 스페인은 형식상 중립국이었지만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세력이 [[나치 독일]] 및 [[파시스트 이탈리아]]로부터 지원받은 인연 때문에 추축국과 관계가 매우 좋았으며 당연히 일본과도 공식적인 동맹 관계만 아닐 뿐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렇게 친 추축국 성향을 보인 스페인이 단교할 정도로 당시 일본군의 행각은 막장이었다. >"중국 전선에서 맛봤던 그 맛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 >― 연쇄강간살인마 코다이라 요시오(小平義雄), 전후 7명의 일본인 여성을 강간살해하고 경찰에 체포된 뒤 한 진술에서 심지어 중일전쟁 당시 강간 살해에 맛이들려 전후 일본에서도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던 퇴역 군인이 체포된 사건마저도 있을 정도였다. 현재도 [[일본 정부]]는 당시의 만행을 부정하거나 축소하지만[* 일단 [[무라야마 담화]]에서 전쟁범죄와 잘못을 인정하기는 했고 현재까지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본 총리를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이 간혹 망언을 일삼거나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하며 주변국들을 자극한다.], 일본 제국은 전선에서 공식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하거나 공개적인 잔혹행위를 장려했다. 일본군의 학살과 집단 강간의 대상은 추축 동맹국도 가리지 않았다. [[마닐라 대학살]] 당시 일본 제국군은 뭐 학살 과정에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었는지 동맹국인 나치 독일의 갈고리십자 깃발이 당당히 걸린 마닐라 독일인 클럽에도 처들어가서 당당하게 건물에 불을 질렀고 800명 가량의 사람들을 학살했다.[[https://www.abc.es/cultura/abci-morir-matando-recuerdo-traumatico-supervivientes-espanoles-masacre-manila-202002290140_video.html|출처는 스페인의 주요 일간지 ABC(스페인어)]] 당시 20여 명 가량의 일본 군인들이 독일 클럽 내 여성들을 노소를 가리지 않고 마구 강간했으며, 소녀 한 명을 강간하고 살해한 뒤 시체를 훼손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https://books.google.co.kr/books?id=MmRSDwAAQBAJ&pg=PT230&redir_esc=y#v=onepage&q&f=false|#]]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마닐라 대학살,version=15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